대구의 봄


어제는 엄마 생신이셨다. 날이 참 좋았다. 버스 안은 더울 정도로 볕이 좋더라.

벚꽃이 져가고 목련이 피어나는 철이다.

내가 처음 사귀었던 첫사랑의 그 애와 함께 걷던 벚꽃길이 생각났다.
그 애와 함께 했던 마지막 봄이였다.
함박눈보다 더 많은 벚꽃들이 바람에 쏟아내려져서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시간이였다.
마치 동경 바빌론 애니메이션 한 장면 같았는데,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풍경 안에 내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과 따스하고 두근거리는 봄바람 가득한 시간이 들어있었다.
우방타워랜드 근처의 벚꽃길이였다.

이제는 연락을 하지않는 친구와 함께 했던 봄날 밤의 벚꽃도 기억난다.
클럽에서 함께 놀다가 둘이서 같이 추워하며 힐을 신고 시내에서 법원까지 걸었다.
밤 조명에 비치는 벚꽃이 너무 예뻤다. 우리는 우울하고 기쁘고 설레여했다.

함께 떠났던 경주 떡축제 벚꽃놀이도 기억난다.
여자애들끼리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두근거리는 법이다.
여름엠티의 그 짠한 햇살의 기억과 다르게 봄날은 너무 부드러운 봄바람이 괜히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핑크색과 노란색, 아이보리색 파스텔 톤의 달달한 공기들.

사랑한다의 반댓말은 사랑했다, 라고 한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참 어렸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갈팡질팡 비틀대며 살아왔다.
지금도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나가는 중이다.


사람들이 죽고 또 태어나고 봄은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체육복을 입고 교정에서 따스한 봄햇살을 즐기던 그 시간들이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용서받지 못했던 일들과 나를 속인 사람들, 또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과 내가 속인 사람들.
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많은 응어리들과 오해들, 그보다 더 즐거웠던 기억들.

그렇게 괴롭고 힘들던 시간들도 지나가면 그저 과거들 중 하나가 된다.
어차피 나이가 들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각자의 세계가 만들어지면 우리는 예전만큼 가까울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구태여 그렇게 서로를 못 견뎌할 필요는 없었는데, 예전에는 그게 안 됐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우리들은 이제 서로의 옆자리에 더이상 머무르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나아간다.
그래서,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또 들을 수 있는 친구들이 소중하다.

아슬아슬 위태위태 했던 나날들, 나는 얼만큼 컸고 또 얼만큼 자라나는걸까?

무엇이든 미루는 것보다는 지금 하는 것이 제일 좋다.
이렇게 날씨 좋은 봄날은, 집안보다 바깥에서 햇살을 맞으며 보내는 것이 더 유익하다.
아주 단순한 몇 가지 교훈들을 가지고 또 나아간다.

사랑했던 풍경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그 안에 있던 우리들은 너무 자랐다.

당신이 잘 지내면 좋겠다.
대구의 봄이 너무 예뻐서 보여주고 싶은 당신에게도
아마 이 봄날의 따스함은 찾아왔을 테니까.





by 아이 | 2008/04/05 15:26 | girl talk (18세 소녀감성)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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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다행이다。 : 벚꽃, 눈물이 .. at 2009/04/08 07:39

... 그 때 이제 막 화장을 시작한 2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이였다.클럽에서 놀다 나와서 웃으며 수다를 떨다가도 금새 눈물이 그렁해지던 삶에 지친 여자아이들.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던 마지막 벚꽃눈도 떠오른다.잊을 수 없는 사람. 잊을 수 없는 장면.봄햇살은 병아리 솜털처럼 눈부시게 노랬고 포근한 봄바람 속에서 마치 함박눈처럼 흩어지던 그 날의 벚꽃들.나는 ... more

Commented by 유클리드시아 at 2008/04/05 16:01
헤에... 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계시군요. ..저는..-ㅅ-;; 버림받아서 방황하던 기억밖에는..
Commented at 2008/04/05 17:2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복숭씨 at 2008/04/06 20:17
진해 군항제 다녀왔슴다. 꽃은 꽃이고 뚜벅이는 발바닥 저림....
그래도 평균 나이 22, 23? 정도의 꽃다운 청년들을 부여잡고
사진을 찍어달라 졸라서...찍은걸 보니 외간남자들과 찍은 바람난 청춘의 사진뿐...

사랑했다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생각했음.
지나친 누군가를 두번 다시 사랑할 수 없었으니까...ㅜㅜ
Commented by 아이 at 2008/04/08 14:32
유클리드시아 // 아니 뭐 저도 봄비 맞아가며 거리(?)를 헤매던 기억도 있지만..
아무래도 봄은 좋았던 순간들이 더 기억에 남네요. 풋풋하던 순간들이 정말 많아요.
그리워라.

비공개 // 저도 그래서 안쓰러운 맘이 들고 그래요. 000양 포스팅 보면 내 일 같고^^;
좀만 더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진짜 시간은 약이더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올거예요. 토닥.

복숭씨 // 와.. 군항제! 그런 축제 안 간 것도 오래됐어요. 좋으셨어요?
후후 청춘일때 남겨둬야죠, 사진은^^

그러게요. 사랑했던 사람, 죽을만치 애 태우던 시간들 전부 가고나니 이젠 씁쓸한 감정만 남네요.
그 사람도 그럴까...(라고 생각하는 것도 미련이겠죠?;)
Commented by 은사자 at 2008/04/08 19:01
정말 사랑했던 사람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어요. 갑자기 이 글을 읽다가 그 날이 생각났어요. 한 여름 비가 막 오던 날 "눈으로 직접 보고 정신 차리자" 라는 오기로 부득부득 부산까지 내려갔답니다. ("부산의 여름" 쯤 되려나요) 그리고 막상 보게되니까.. 행복을 빌어주게 되더라구요. 지금은 아마 다시 만나면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바탕 웃을 것 같아요. (아, 갑자기 맥주 댕긴다 -- * _*)
Commented by 아이 at 2008/04/10 16:51
은사자 // 와.. 진짜 맘이 묘했을 거 같아요; 전 어떠려나. 이젠 소식도 없고 왕래도 없지만 그래도 행복해라- 싶은 맘은 같을 것 같아요.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시기. 정말 그런 시기가 온다면 마음이 더 가벼울 수 있을텐데.
전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하나봐요.

(아니 이건 싱글이라서 그런지도 ㅠㅠ; 저도 어제 급 맥주 땡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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