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한강을 지나왔다.


아, 이렇게 착하고 질긴 시위대 봤나요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836813

여느 때처럼 이불 속에서 졸린 눈을 부비며 꿈지럭대다가 출근을 했다.
동국대 혜화문을 지나서 신사역으로 향하는 3호선 안에서 서서 전철 창 밖으로 한강을 바라보았다.

문득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한강은 십 년 전일거다. 97년? 98년?
펜팔을 하던 분당 친구 네서 잠을 자고 만화행사장으로 향하던 전철 안에서 한강을 보던 기억이 난다.
반바지를 입은 여자애 둘이서 사람으로 꽈악 찬 지하철 안에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게임동인을 만들자! 고 밤새 우리끼리 쫑알쫑알 신나했었는데 유현님의 vs mode책 나온 걸 보고 포기했었지^^;)

주말 한 낮에 햇빛을 받고 반짝거리던 한강은 참 아름다웠다.
대구에서 올라와서 내가 좋아하는 만화행사까지 가는 그 길은 얼마나 설레였던가.
연신 웃음이 나고 가슴이 콩닥거려 촌닭처럼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고개를 참을 수 없을만치 신나하던 어린 내 모습을 기억한다.



99년 겨울, 특차에 합격해서 서울에 올라와서 인천 고모네 집에서 특차합격생들을 위한 특강을 수강했었다.
2000년도 초 겨울- 언제나 왕복 4시간을 지하철 안에서 보냈었다.
많이 쓸쓸하고 외로웠다. 작은 고모는 언제나 친절하셨지만 나는 딱히 이야기 나눌 친구도 없었고 고모네 애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매일 매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내가 보던 한강만은 기억한다.
언제나 외롭고 힘들던 내게 있어 유일한 낙은, 전철 안에서 한강 위를 지나는 시간이였다.
사람이 별로 없던 평일 오후 시간. 저무는 석양의 한강은 아름다웠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창가에 얼굴을 바짝 대고 바라보았다.



이십대 초반의 여름 밤.
신천에서 혹은 강남역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의 버스 안에서 바라보던 동호대교라던가
예전 남자친구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한강 대로변도 기억한다.

계절마다 또 시간마다 한강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는데
어느 때는 나에게 쓸쓸함을 잊게 해 주는 친구 같았고
또 어떨 때는 쓸쓸한 기분을 증폭시켜서 떠들던 입을 막아버리고 눈가에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엄마의 뒷모습 같았다. 


내게 한강은 그랬다.


십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의 내 모습이 새삼스럽다.
내가 원하던 많은 것들은 흘러 흘러 지나가고 나는 여러 모습으로 바뀌며 여기까지 살아왔다.
얼마 전, 대구에 내려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동성로를 걸으며 나는 지금 내 나이가 되면 무언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며 함께 웃었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보통의 범주 안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함께 살며 혹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어릴적의 우리는 몰랐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그렇게 무난하게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 사랑하는 이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님처럼 그렇게 순탄하게 살 수 있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평화라는 것은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였기에 모험을 꿈꾸고 일탈을 소망했다.
대입도, 취직도, 연애라던가 결혼도-
조용하게 진행되는 삶과의 투쟁이고 쟁취라는 것을 몰랐다.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게 눈부시게 찬란한 기쁨과 행복인지, 혹은 당장이라도 포기하고플 정도로 지긋지긋한 지루함과 우울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왜냐면 생이라는 건 잘 비빈 비빔밥의 나물과 고추장과 밥처럼 뒤엉켜 한덩이를 말하는 거지
씁쓰름한 씀바귀 나물과 매운 고추장과 고소한 참기름을 각각 떼어놓고 어떤 맛이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제각각 살아가며 느끼고 맛보는 인생이 다르기에.

.....

한강은 알고 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있었고, 흐르고 흐르며 세상을 지켜본
이 땅은, 산과 들은, 강은 알고 있을까.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고 있을까.


전쟁으로 피가 흐르던 때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주말마다 웃으며 거닐 던 때도 있었던 한강은
아마 내가 죽고, 또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다음에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혼자 전철 안에서 한강을 지나며 울던 시간들도
누군가와 손을 잡고 한강 대로를 지나며 설레던 시간들도 지나간다.

촛불시위의 지난 시간들이 흘러갔듯이 아마 오늘의 기억들도 십 년 후에는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다가올 그 시간들에도 분명히
어린 연인들은 맹렬히 사랑을 하고, 권력자들은 부와 명예를 탐내고, 여자들은 아름다움을 탐하고, 외로운 이들은 인생을 함께 해 줄 누군가를 바라고, 가난한 이들은 눈물을 참을 것이다.

몇 천 년, 몇 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하이텔과 천리안, 개인 홈페이지, 싸이월드, 네이버 블로그를 거쳐 이글루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늘 같은 시도를 했다.

[좋은 것만으로 채우겠다]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들만 쓰자]
[웃음을 줄 수 있는 곳을 만들자]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면 우울한 말투로 우울한 이야기들을 지껄여대고 있다.

원하는만큼, 솔직해질 수가 없다.


...

어제 길을 가다가, 몇 년 전 알던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아직도- 나를 알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이글루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알던 언니의 이글루를 발견했지만, 웃으며 말을 건낼 수 없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하고- 구태여 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분명히, 한 때는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우리.


하지만 나는 나름 꾸준히 온라인 생활을 지속하며 글을 쓰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혹은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상을 담는 것뿐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개인적인 작은 공간이다.

늘 번번히 만들었던 초기의 마음이나 목적과는 다르게 유치하게 진지해지는 스스로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분명.

아침 햇살이 빛나는 한강을 보며 느낀 감동이 변하는 것처럼
나는 한국의, 내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보며 울고 웃고 한숨을 쉰다.

내 우울을 극복하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아마 이 곳에서 계속 즐겁고 우습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시도할 것이다.
몇 번이나 실패하지만, 시도를 거듭하는 것처럼
나는 또 애를 쓸 것이다.

남한, 이 나라 역시 그러할 것이다.

썩은 윗 사람들이 있어도, 아래에서는 제대로 나아가자고 버둥댈테고
끊임없이 권력을 쥔 사람들은 부를 쫓을테고
그래도, 바뀌어야한다고 믿는 이들은 거리로 나설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슬프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아프고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고맙고
참, 다행이다.

한강이 흐르고 있고 사람들이 살아 가고 있는 동안은 계속될 이야기들.
좌절의 무게만큼 희망도 크다.

사는 것, 살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내 생명, 내가 누리는 자유, 내 목숨 하나를 위해 흘려진 피와 눈물과 희망이 무거워서다.
갚을 것이 아직 너무 많다.

바뀔까, 바뀌지 않을까.
보지 못하고 떠날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마음만이라도, 관심만이라도 좋다.
간절하면 움직이게 된다.

어리고 여리고 착한 이들이 안 다치면, 덜 다치면 좋겠다.





by 아이 | 2008/06/03 15:03 | 低俗하게 blahblah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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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매듭 at 2008/06/03 16:42
서울 토박이인지라, 언제나 한강은 고마운 친구였죠. 예전에 집이 가까웠을 적엔 저녁마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맥주 한캔 마시고 들어오는 그 맛이 정말 좋았다는.

간절한 마음들이 모여, 정말 무언가가 바뀌기를 기대해봅니다.
Commented by 아이 at 2008/06/04 10:35
여름 날 한강변에서 맥주 한 캔은 정말 멋질 것 같아요!
일 끝난 후의 치킨이랑 맥주!

간절하면 움직이게 되어있고, 움직이면 바뀌게 되지요.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매일을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플라멩코핑크 at 2008/06/04 00:09
아 왠지 제가 오히려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죄송하고 그래요 ㅠㅠ
멀리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금참여하고 선거하고 뭐 이런 것 밖에 없답니다 ㅠㅠ
아 매듭님 리플보니 맥주 먹고 싶어졌다능...^^
Commented by 아이 at 2008/06/04 10:34
뭘요; 그 마음 충분히 알 것 같아요.
작년에 제가 일본에서 느꼈던 안타까움과 부끄러움, 속 상함..

아아 맥주! 건너오세요 같이 한 잔 해요 ㅋㅋ
Commented by 미도리 at 2008/06/04 00:38
어리고 여리고 착한 이들이 안 다치면, 덜 다치면 좋겠다.(2)...^^
Commented by 아이 at 2008/06/04 10:33
히히 착하고 예쁜 미도리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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