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시 이야기 (1) 인문계 - > 예체능계


정시까지 가자에 엮습니다.




내가 진로를 다시 정한 것은 고3 봄이였다.
난 그 때만해도 그림 계열로 직업을 가지려면 미대에 가야만 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공주전문대에 가고 싶었지만 당연히 부모님께서 2년제는 반대하실 꺼라고 생각해서 접었고..(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엄마가 그냥 너 하고싶은대로 하지 왜 그랬냐는 말을 하셔서 머리가 어찔~! ㅠㅠ;; 크흑 나 삽질한 거야?)

뒤늦은 시작이였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예고에 다니거나 고등학교 입학 초부터 꾸준히 학원을 다니며 실기를 준비했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순수 미술이 아닌 디자인 계열로 진로를 정한 것은 진로상담을 통한 막연한 선택이였던 것 같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선 입시 미술에서는 석고소묘(뎃생)를 한다.
주어진 시간 내에 빛의 흐름과 형태-덩어리감-를 파악하고 종이 위에 그것을 옮겨내야 한다.
소묘는 미술을 배우기 위해 가지고 있어야할 기초적 능력이나 다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 긋기부터 아그리파며 비너스, 각종 석고상들의 얼굴과 친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들이 내겐 참 힘들었다.
남들보다 잘 배우고 빨리 익힌다는 평을 들어도, 출발이 늦은 내게 대학 문은 좁고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통수학으로 좁혀진 범위는 신났지만; 어차피 수능이야 누구나 하는 공부니까;)

석고소묘를 완벽하게-까지는 아니여도 주어진 시간 내에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
나는 결국 석고 대신 정물 소묘, 정밀묘사쪽으로 방향을 틀었고(그 쪽이 내게는 더 쉬웠었다.)
지망할 수 있는 수도권 대학은 여대와 시립대로 좁혀졌다.

나는 소묘보다 디자인쪽에서 더 두각을 드러낸 편이였다.
학원에서 수업을 받은 첫 날 내가 받은 극찬은 나를 신나게 만들었지만, 나는 내 그림의 특성을 바꾸고 죽여야만 했다.
눈에 튀는 색이며 형광에 가까운 색 선택은 학원이 지향하는(학원별로 그림 스타일이 틀리다) 합격 스타일과 달랐기 때문이다.

실기 평가를 하는 교수님들의 나이대는 눈에 튀고 선명한 순색들보다는 명도와 채도가 낮은 색, 중후하고 기품있어 보이는 색들을 선호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색의 어울림, 색채학에 관련된 센스와 정보 외에도 합격을 위한 입시용 그림을 배워야만 했다.
내가 좋아하던 색들은 전부 금지색 혹은 최소한만 써야할 색들이였다.
개성을 죽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이미 입시라는 전쟁 앞에 선 나와는 멀었다.

대한민국에서 수험은, 입시는 전쟁이나 싸움이였고, 이기기 위한 전략을 바탕으로 힘을 키워야만 했다.
내가 가진 특성, 개성들을 잘라내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줄여서 대학 입시 문턱이 요구하는 모습으로 바꾸고, 그 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예술 안에서 필요한 사고력과 의식보다 일단은 실기. 기술을 손으로 익혀내는 것.
눈으로 빛의 흐름을 읽고 종이 위에 보이는 것과 흡사한 형태를 펼쳐내는 것. 피곤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여서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전부 입시에 몰두하기 시작한 고3 3월 봄. 나는 일탈을 시작한 기분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저런 선택에 일탈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는 게 우습기 그지 없지만, 그 시절. 작은 우물 안에 갖혀있던 나에게는 최초의 반항 같은 시도였으니까.

그림 그리면서 그걸로 먹고 살려면, 그 쪽 관계된 학과를 나와서 더 자세히 배워서- 취업을 해야하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게 보통은 정석이니까.
그런데 사회에 나와 보니까 또 그건 아니더라.
무언가를 탁월하게 잘 하고, 열심히 하고- 그런 건 수업을 듣고 배워서, 라기보다는 자신이 좋아서 하면 실력이 쌓이게 되어있더라.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교수법 아래서 학습된 수준은 고만 고만하다.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은 자신의 흥미와 열정과 분야에 대한 애정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해요?]
난처한 질문이다.
노래를 잘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랩을 하고, 농구를 하고, 프로그램을 짜고, 외국어를 말하고..
그냥 하면 되는데, 매일 하면 실력이 느는데. 사람들은 최상의 기술이 보여주는 화려함에 놀라며 궁금해한다.
지름길이나 그런 것도 있겠지만 핵심은 늘 같다.
애정과 즐기기.

하고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보니 또 말이 샜는데;
나는 우리나라 입시제도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다.
규격화된, 너무나 정형화된 좁은 문.

수학 과학처럼 딱, 답이 떨어지는 부분이라면 모르겠지만 예술 분야에 있어서 성적을 매기기란 어렵다.
그 실력이 고만 고만하면 모르겠지만, 굉장히 뛰어나면 평가가 애매해진다.

시간 내에 밀도 높은 그림을 완성도 있게 뽑아내는 것이 미술 계통 입시의 관건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표현력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만 하는 소양이고, 그것이 되어야 그 위의 수업을 듣고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다 제각각인데, 그 좁은 문이 참 아쉽다.

나는 손이 빠르다. 그것은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짧은 시간 내에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 마치 크로키 같은-에서는 잘 할지 몰라도,
심도있는 세세한 부분을 깔끔하게 표현하고, 정확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마이너스다.
고치고 고쳐가며 완성도를 높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버릇이 들지 못해 내 그림들은 거의 낙서 수준에 머무르다 만다.

하나를 그리는데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해도 그 작품이 굉장히 우수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입시 미술에서는 불리할테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보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 하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작품으로 채워진 포트폴리오를 가지게 될테니까.

요컨대, 양과 질의 문제다. (속도+완성도의)
어느 정도의 시간 안에 얼마만큼의 퀄리티를 가진 작품을 뽑아내느냐,의 수준으로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한다면 말이다.

음. 무슨 이야길 하려고 저걸 꺼냈냐면 이거지.

프랑스였나? 다른 나라 대학 입학 시험에서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3일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수험자들은 3일간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고 대학 입학 여부가 판가름이 난다.
2-3시간 안에 정해진 주제, 사물을 불합리한(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소묘 시험 시 이상한 자리에 배정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그린 그림이 좋은 자리에 걸린 사람처럼 나올리 없다. 운일 수도 있고.. 채점하는 사람들이 그런 불합리하고 억울한 사정을 보아가며 채점을 할지는 의문.) 조건 속에서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것으로 입학 여부가 갈리는 우리나라의 입시미술 제도.

난 우리나라 예체능 입시가 우리나라 예술의 미래까지 비슷비슷하게 만들어 낸다고 느낀다.

다양한 화풍과 실험 정신이 존중받는 세계 예술의 흐름 안에서
우리의 미래 예술인(어리다고 미래,라는 단어를 붙여서 미안하지만 사회적 활동을 생각했을 때^^;)들이 다 같은 화분 안에서 같은 환경으로 자라나는 게 안타깝다.

고목나무를 철제 양동이에 키워내거나, 장미를 소나무와 같은 땅에 심는 것 같다.
같은 환경, 같은 생각, 비슷한 화풍과 안정적인 구도를 뽑아내도록 강요하는 이 땅의 입시 미술 아래서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숨 막혀하며 커나가게 될까.

개성을 죽이고 획일화된, 비슷 비슷한 느낌으로 자신을 고쳐가는 것에 익숙해지기보다
다양한 의견과 느낌, 의도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차별성을 존중해 줄 수 있는 한국이길 바란다.


---------------

근데 솔직히 현실 앞에서는 어려운 걸 안다.
많은 학생들 수에 비해 모자라는 교수진과 우리네 학업 환경.

그냥 뎃생으로 형태감에 대한 점수를 매기고, 색채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실기 같은 걸로 점수 매기고. 그게 젤 편하긴 편하지.
학생을 위한 시험이 아닌 학교 입장에서 인재를 뽑기 위한 시험에서는.

뽑혀서, 그 문 안으로 들어가야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아냐?
아아, 그래서 내가 블로그라는 시스템을 사랑해. 누구든, 어떤 이든 자신의 목소릴 낼 수 있는 공간이라서.
아고라, 광장 같은 느낌이지만 그 안에 제각각의 방이 있다.



나 분명히 입시에 대한 이야기 쓰려고 했는데 하고픈 말이 많아서 글이 중구난방-_-;


주제를 간략화 시키고, 한 번에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달법임을 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자꾸 이것 저것 상관없어 뵈는 것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이야기가 툭,툭 튀어나온다.

3000포쟁이; 어후. 욕심이 많고 급한 성질이 글에서도 느껴지리라 생각된다.

뭐, 암튼.
입시생들 파이팅!

다음엔 좀 차분히 정리해서 글 써야지;;

해외의 다른 대학 입시 미술에 대한 정보가 더 있다면 알려주세요. 궁금합니다 :)





by 아이 | 2008/08/29 09:54 | ㄴWorkroad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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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백드럼 at 2008/08/29 10:13
입시미술 예고3년포함 4년 빡시게 했더니 대학 1년 내도록 개고생해도 입시스타일이 없어지지않았음. ....대학입학하고 버려야되는 입시공부라니 이게뭥미, 라고 저주했음.
Commented by 아이 at 2008/08/29 11:05
으으으 ㅠㅠ 우리 소앵 ㅠㅠ 그치 손에 붙은 버릇 같은 거 절대 안 떨어지지.. 흑 ㅜㅜ
자기가 원하는 그림 스타일에 맞지 않는 입시미술병이라니.

그치만 그것도 나름 네 스타일의 일부가 되었으니..
바꾸려고 애 써야 하는걸까 ㅠㅠ 아쉬워 너무.
Commented by 알바트로스K at 2008/08/29 10:15
재미있어요. 연재해주세요 'ㅂ'
Commented by 아이 at 2008/08/29 11:05
ㅎㅎ 그럴라구요. 도움 주고픈 사람이 있어서.
Commented by layil at 2008/08/29 11:48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정말 그래야 되는 줄알았죠..정석. 꼭 수업을 들어야되고 과제를 하고 그래야 되는지 알았어요.
근데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보니 몇년간 비싼돈 주며 들은 수업보다 그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이 진로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걸 깨달았어요. 왜 이런건 늘 지나고 깨닫는지..
좋아하고 즐기고 유지하고 원하면 이루어지는거 같아요. ㅎㅎ
Commented by 아이 at 2008/08/30 15:29
맞아요. 좁게만 보이고, 꼭 다들 가는 길로만 가야한다는 그 틀이 우릴 무겁고 힘들게 만드는 거죠.
에휴;

즐겁게 즐기며 살 수 있는 매일이였음 좋겠어요.
가엾은 한국의 수험생들-_ㅠ
Commented by 삼별초 at 2008/08/29 19:57
그림말고도 요리쪽도 문제가 심각하죠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음식을 가르치는곳은 거의 없고 그저 겉보기만 좋아라 보이면서 사회에 나가면 학교에서 배운것이 몇% 도움이 되지 않는 조리과들이 너무 많아요 쩝;;

한국에서 한국음식을 배울곳이 없다는 점

요리사로서 그저 안타깝습니다
Commented by 아이 at 2008/08/30 15:30
한국 요리에 관한 전문 포스팅을 기획으로 써 보시는 건 어떠세요?

강력히 추천 드립니다!@
Commented by 자그니 at 2008/08/30 12:08
전 이과-예체능- 문과......
Commented by 아이 at 2008/08/30 15:31
오;; 다재다능! 그래서 자그니님 글에 체계성 + 표현력 + 감수성 + 논리성이 그렇게..
(아부아부-0-)
Commented by 도기리 at 2008/11/22 08:46
독일은 입시미술학원에 안감. 시험제목은 자유로이 당일날 받음. 테크닉보다는 아이디어만 잘 나타내도 합격함. 테크닉은 창의력 상실을 초래하기 때문인걸로 앎. 실제로 잘 그리는 사람보다는 생각이 좋은 사람이 성공하는 나라임. 모두들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나라임. 한국에서 공부한 난 지금도 대학학비가 아까워.. 교수들 정말 실력도 없고 머리도 없음.
Commented by 도기리 at 2008/11/22 08:50
솔직히 한국에서 학원다니는 시간에 독일어 배워서 일찍 유학가는게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독일엔 독일어만 잘하면 학교 입학은 쉽다. 그리고 학비는 한국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다. 생활비는 학교다니면서 계단창소나 등등만 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한국에서 대학공부하고 독일오면 공부 새로해야 한다. 특히 예능계..여긴 한국에서 서울대학을 나온 사람이나 골짜기 대학 나온사람이나 동등하게 여긴다. 어차피 한국은 인정하지 않으니깐,,
모두들 해외나가서 공부하고 들어가면 좋은 인생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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