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다가, 불현듯 갑자기 사과가 미친듯 먹고 싶어졌다. 껍질 째 먹는 차가운 사과, 이를 들이대어 껍질을 뚫고 아삭하게 배어나오는 달고신 과즙, 입안에서 사각 사각 씹히는 과육 조각들. 우스운 일이다. 어릴 적에는 박스에서 썩어 내다 버릴 정도로 발에 채이는 과일이 사과여서- 무척 싫어했었고, 과일로도 여기지 않던 사과가 칠팔년 전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귀한 몸이 되셨다. 사과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서 과일님으로 승격하셨고, 아오리 사과는 그 향과 맛으로 내 안에서 홍옥과 함께 양대 사과님으로 자리 잡으셨다.
참 우스운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고 바뀐다. 목숨을 걸 정도로 소중하던 것들이 어느새 잊혀지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니였던 모르던 것들이 인생의 중요한 화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 살아보아야 아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전화를 받았다. 미국에서 걸려온 그의 전화를 받았다.
지하철 6호선 안에서 받은 핸드폰 너머, 전파에 실린 그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내가 끝낸 질문들을 아직 이어가고 있었다.
왜 사는 걸까, 하나도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나는 그가 작년 겨울 죽고 싶다며 울던 내게 건네던 침착한 어조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냈다. 스스로가 느끼지 않으면 와닿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피상적인 내용들을,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하고 싶던 이야기도 전했다.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 용서하는 날이잖아. 나, 그때 오빠가 나한테 했던 일들 다 용서할께.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빠도- 내가 잘못했던 것들 있으면 그냥 다 용서하고 잊고 살았으면 좋겠어.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행복하게 즐겁게 보내야지. 왜 거기까지 가서 그러고 있어. 오빠 인생은 오빠꺼잖아, 돈 벌고 싶으면 벌고, 일하기 싫으면 그만해. 포기한다고 누가 뭐라고해도 본인이 힘들면 그냥 그만 둬. 결국은 오빠 자신이 선택한 길이잖아. 기운내.
그리고.. 나. 다 용서할께, 잊을께. 그러니까 오빠도 나한테 맺힌 거 있으면 용서하고... 풀어.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전하기 까지 몇 년이 걸렸는지 세어보지 않았다. 살고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바뀌게 될 날이 올 줄도 몰랐다. 울지 않고 오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꿈에서도 볼 수 없던 날들이 있다.
살아가고 또 다른 나를 알게된다. 부끄러운 나를 지우며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였다. 한동안 먹지못했던 사과가 오늘 새벽, 이렇게 간절해질 줄- 어제의 내가 몰랐듯 오늘의 나 역시 내일의 실패도 꿈도 알지 못한다.
더 살아보아야 알 수 있으니까- 나와 나의 사랑하는 이들, 내가 사랑하는 세상과 내 미래를 알기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
사과가 먹고싶은 이 식욕도 언젠가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흘러가 사라지리라. 내가 흘렸던 피나 눈물, 혹은 원망과 기도, 또 감사처럼 정말로 행복했던 순간, 슬펐던 기억처럼 흐르고 쌓여서 내가 되리라.
... 집 앞 슈퍼 문 열었을까? ㅠㅠ 어젯 밤에 사과 하나 사 올껄;;;; ㅠㅠ 홍옥과 아오리가 먹고싶다; 없으면 부사라도 ㅠㅠ
사과, 용서, 사과여서, 과일, 홍옥, 과즙, 부사, 아오리사과, 아오리, 이오리, 아님, 파란사과, 신사과, 향긋한사과, 사과향, 물담배, 크리스마스, 그의전화, 국제전화, 입장이바뀌었음, 반대로, 우습지
# by 아이 | 2008/12/26 07:08 | ㄴ글(시,소설,수필,동화,기사)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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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펴고, 여유를 가지고, 웃으면서 조근조근.
감사하며 먹고 사는 이야기.
by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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