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필리어


예전 이야기.

어떤 경험 때문에, 특정 단어나 그림을 보면 연상되는 것.
혹은 기억.


내 경우에는 햄릿의 오필리어가 그렇다.


John Everett Millais, Ophelia (1852)
http://en.wikipedia.org/wiki/Ophelia_(painting)

(중략)

셰익스피어 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찍기 위해 추운 겨울, 차가운 호숫가에 몸을 담그고 벌벌 떨면서 영화를 찍던 기억도 난다. 햄릿의 오필리어 역할을 맡았었는데, 오필리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어레인지되어서 그 어떤 배우들보다도 내 역할의 비중이 컸다. 길지 않은 짤막한 단편이라서 대사가 너무 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미친, 광기 어리면서도 순수한 오필리어의 모습을 내 안에 담기에는 좀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화관을 머리에 쓰고 얼음장처럼 찬 물 속에서 몸에 기운을 빼고 누워 부드럽게, 행복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워낙 추위에 약한 데다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 독한 겨울 호숫물의 한기가 얇은 드레스 너머 피부 속 뼈 구석 구석까지 퍼져 근육이 움찔 움찔 긴장으로 굳었었다. 차가운 기운에 바르르 떨리는 입가를 미소로 만들기 위해 추위로 고통스러운 나를 잊고 따스한 봄 날 호숫가에서 꽃과 나무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오필리어의 마지막을 연기해야 했다. 표정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제대로 카메라에 담기고 있는지 같은 것을 신경쓸 여유 같은 건 머리 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오필리어와 죽음. 늘 내가 지난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떠올리는 죽음 너머의 평온한 세계와 따스한 잠을 내 안에 넣어 행복하게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오필리어가 되려 애 썼다. 씬의 특성 상 한번에 찍지 않으면 다시 젖은 드레스를 말리고 찍거나 다시 촬영일을 잡아서 스텝과 배우 모두가 모여야 했기 때문에 보다 그 어떤 장면들보다도 오필리어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불행하면서도 사랑함으로 행복했던 극 중의 그녀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기억이다.

(후략)





by 아이 | 2008/12/30 04:53 | ㄴ글(시,소설,수필,동화,기사)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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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12/30 14: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아이 at 2009/01/12 15:13
앗 저한텐 굉장히 소중한 기억이예요.

자주 들러주세요. 사실 전 제 나름대로 너무 미화해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부끄부끄하며 썼는데 말이죠 히히; 반가워요! 그 때 만드셨던 화관 저 아직 갖구 있답니다^^ 잘 지내시죠?
Commented by 김반장 at 2008/12/30 16:23
저도 참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
Commented by 아이 at 2009/01/12 15:13
그림 참 아름답지요?
Commented by nadia at 2008/12/31 02:09
저도 좋아해요 라파엘전파의 그림이죠? 그러나 세익스피어는 어렵다는
Commented by 아이 at 2009/01/12 15:14
어려워도 좋아요, 히히. 나디아님 그림 취향 저랑 비슷하신가봐요 or 제 취향이 나디아님 취향이랑 비슷한가봐요. 기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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