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 깨서, 새벽 4시 반 정도에 나갔다 들어왔어요. 간밤에 왔던 비 때문인지 파르스름한 여름 새벽이 어둑 어둑한 하늘 저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옵니다. 평소라면 훨씬 밝았을텐데.
간만에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여름을 느낍니다.
여름을 참 좋아해요. 아마,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봄 여름 가을 중에서 무척이나 고민하다가 여름을 꼽을 거예요.
이유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잘 오지 않는 여름밤도- 그렇게 묘한 기분으로 밤을 지새우거나 누군가와 함께 밤을 새고 맞이하는 여름 새벽도 무척 좋아해요. 단 내가 물씬 풍기는 향긋하고 촉촉한 물 많은 복숭아도 좋아하고, 아삭 아삭 새콤한, 여름 끝에서야 만날 수 있는 아오리 사과도 정말 정말 좋아해요.
여름밤. 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지나간 여름 날의 열정 가득했던 시간들을 떠올립니다. 2002 월드컵 시즌에 경기가 있는 밤이면 사람들과 모여 맥주를 마시며 함께 응원하기도 했고 마감이 겹치는 날이면 눈알이 빠져라 도트를 찍으면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귀를 쫑긋, 기울이기도 했죠.
가끔 밤새 심야영화를 보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던 여름 새벽 정동길이라던가 MT에서 술자리로 밤을 지새고 사람들 몇몇과 함께 맞이하던 여름 새벽.
언제나 여름은 가슴 두근거리던 일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여름은 참 사랑스러워요. 사랑하던 연인의 즐겨쓰던 샴푸향기처럼, 나를 가슴 두근거리게 만들고 또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여름은 없었어요. 언제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지나가 버렸던 계절. 나는 많이 울고 또 더 많이 웃었어요.
기대하는 것만큼의 굉장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름은 그냥, 여름일 뿐이니까요.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는 것처럼, 조금 설레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계절이니까.
뜨거운 여름 햇살이라던가 피부가 타서 갈색이 된다던가, 그런 것은 정말 정말 싫지만 그렇게 타오르던 여름 낮이 있기에 새벽과 밤이 그렇게 내 가슴과 머리와 눈과 발등을 서늘하게 적셔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장마철 습기 가득한 여름의 공기도 끈적거리는 수증기 가득한 낮 시간도- 약간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하거나 아니면 더운 물로 씻고 나온 다음 에어컨을 틀어놓은 방에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는 것으로 상쇄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여름은 그런 계절이예요.
하염없이 누군가를 그리워 해도 좋은 계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흥얼거리면서 찬 여름의 비가 지나간 흔적 너머로 사랑스럽고 뜨겁던 시간들을 추억하는 시간.
혼자 남겨진 시간도 여름이라면, 조금 덜 외로워 할 수 있어요.
파랗게 내 방 창문을 물들이는 여름 새벽은 짧고 시선을 돌린 사이 어느새 아침은 햇살 가득한 여름 아침으로 변해있지요. 장마가 지나가고 난 직후의 아침은, 푸르고 싱싱한 나무와 풀들의 일출맞이로 생명력이 가득히 느껴지고 밤을 새고 나서 맞이하는 그 아침은, 졸리면서도 기운이 솟는 이상한 기분.
여름 저녁,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 앞에서 친구와 함께 맥주와 치킨을 먹고 마시면- 왠지 이 여름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 사랑스러운 친구들. 언제까지고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참...
이 여름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검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반짝이는 여름 밤.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나 맞이하는 파르스름 새초롬한 여름 새벽. 양산 끝트머리 너머로 눈이 부시게 쨍쨍한 여름 낮. 어스름 땅거미와 취한 사람들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여름 저녁.
그 시간 사이 사이에 나와 부딪치고 만나고 헤어지고 돌아서고 계속해서 그리움을 낳고 쌓고 그렇게 흐르는 많은 인연들.
여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는 목소리로 여름에게 이 사랑을 고백합니다.
봄날 흩날리는 꽃잎이나 가을 낮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기분과는 다르게 창 밖에 무수하게 쏟아져내리는 장대비를 바라보면서 나는 또 이 사랑을 흘려보냅니다.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올 나의 사랑하는 계절, 당신은 내 그리움의 조각입니다. 2009년 07월 13일 04시 50분에 남긴 음성
'가끔 밤새 심야영화를 보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던 여름 새벽 정동길이라던가' 라고 하면은, 혹시 스타식스인가요?? 숨겨놓은 보석같은 공간이었는데... 어둑어둑한 12시에 복작거리는 마음으로 가서 밤새 영화를 보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7시에 새로운 마음으로 종로를 거닐던 여름 새벽의 기억은 저에게도 참 소중하답니다 :)